Théorie de la mort 

  死, Tod, La mort, Death  

  죽음이란 무엇일까. 살아있는 모든 존재는 언젠가 죽기 마련이므로 항상 이런 생각을 해 왔다. 나만 이런 생각을 한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죽음이란 것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많은 심리학자와 철학자들도 죽음에 대한 글을 쓰고 이론을 전개했다고 알고 있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된 동기에는 많은 이유가 있겠지만 가족이나 친척, 이웃처럼 가까운 사람의 죽음이 있거나 큰 병을 앓고 있어서 곧 죽을 처지에 놓여 있는 경우처럼 죽음과 연관이 있는 상황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에게 있어서는 TV와 신문에서 나오는 사건과 사고나 자살에 대한 기사와 소설과 영화, 드라마 속 주인공이나 악역이 죽는 장면, 그리고 할머니를 비롯해서 친척과 이웃의 죽음이 복합적으로 죽음에 대한 생각을 하게 하는 동기가 되었다. 여기에 더불어 어떠한 사물이나 현상에 대한 철학적인 생각을 하는 것을 좋아하는 것도 동기가 되었다.

  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나는 초등학교 4학년이었고, 어렸기 때문에 죽음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그리고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접한 때가 잠자고 있던 새벽이라서 비몽사몽간에 뭐가 뭔지도 잘 모르는 상황이어서 울지도 않았다. 그 당시의 나는 죽음이라는 것은 그냥 볼 수도, 느낄 수도 없는 곳으로 가는 것이라고만 생각했다. 다만 할머니가 천식 때문에 상당히 고통스러워 하셨던 것을 알고 있었기에 그 곳이 편안한 곳이길 바랄 뿐이었다. 그리고 2008년 올해 외숙모가 돌아가셨다. 암으로 인해 상당히 고통스러워하시다가 돌아가셨다. 소식을 전화로 듣고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못했지만 암으로 고통 받으시던 5월경에 입원해 계시던 일산 암센터에 갔었을 때 고통스러워하시는 외숙모의 모습에 나도 모르게 눈물이 핑 돌았고 죽음에 대해서 실감을 하게 되었다. 외숙모께서는 죽음을 두려워하시지는 않았다. 하지만 나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죽음의 형체를 느끼게 되었고 왜 사람들이 두려워 하는지도 어렴풋이 느끼게 되었다.

  인간은 죽음이라는 것을 상당히 두려워한다. 인간의 기본적인 욕망인 생존에 대한 욕망에 반하는 것이 죽음이라서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리고 또한 형체가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해서도 두려워하게 된다. 만약 우리가 죽음을 경험해봤다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어느정도 사라지겠지만 죽음을 경험해 볼 수는 없잖은가. 하지만 죽음이 과연 두려워해야 할 존재인가에 대해서는 의문이 든다. 불로불사에 대한 이야기도 많이 전해져 온다. 학식과 재능이 뛰어나고 연금술사라고 불리었던 프랑스의 생제르망 백작과 서영의 뱀파이어 전설, 길가메시 서사시 속 현인인 우트나피쉬팀, 인어고기를 먹으면 불로불사의 몸을 가지게 된다는 전설 등 수많은 불로불사, 영원한 생명에 대한 이야기들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을 만큼 사람들은 불로불사에 대한 호기심과 욕망을 가지고 있었고 죽음을 두려워했다. 진시황도 불로초를 찾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던가. 그러나 죽지 않는 것이 과연 좋기만 한 것일까.

  죽음이라는 틀 안에서 삶의 의미를 갖게 된다. 삶이 한정적이기 때문에 그 한정된 시간 안에 하고 싶은 일들과 가치 있는 일들을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고, 이로 인해서 가치와 의미가 있는 일과 그렇지 않은 일들을 구분해 내게 된다. 그리고 결국 삶을 더 의미 있고 가치 있게 만드는 일들을 택하게 된다. 만약 인간의 삶이 무한하다면, 죽음이라는 틀이 삶을 한정시키지 않는다면 그저 공허하고 아무 의미가 없는 삶을 살게 된다. 죽음이라는 것이 존재하기에 인간은 의미 있는 삶을 살게 된다는 말이다. 고로 죽음은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나는 편안하게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인 죽음이이라고 생각한다. 병에 걸려서 시름시름 앓다가 고통스럽게 죽는 것이나 사고로 죽는 것은 사람들이 죽음에 두려움을 갖게 되는 원인이면서 누구나 바라지 않는 죽음일 것이다. 편안하게 죽는 것은 여러 가지 방식이 있겠지만 자면서 서서히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 가장 좋은 죽음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의 손으로 자신의 생명을 빼앗는 자살은 어떠할까. 최근 故안재환 씨의 자살과 故최진실 씨의 자살은 사회적인 이슈가 되었고 베르테르효과를 일으켜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끊었다. 에밀 뒤르켐이라는 사람은 자살을 연구 주제로 삼았고, 많은 유명인들 또한 자살로 목숨을 끊었다. 나는 자살을 옹호하고 싶지는 않다. 자기가 갖는 생명권을 자기가 스스로 포기하는 것을 뭐라고 할 수는 없지만 사람의 목숨보다 중요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한다. 여러 가지 반론이 있겠지만 적어도 나는 그렇다.

  죽음에 의미를 부여해보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이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죽음은 삶을 한정시키기 때문에 삶의 질을 중시하게 한다는 의미도 갖는다. 또한 죽음은 모든 것을 끝내는 인생의 종착점이므로 고통을 없애고 편안하게 하는 의미를 갖는다고도 생각 할 수 있다. 얼마 전에 ‘라스트 사무라이’라는 영화를 보았다. 이 영화 속에서 나타난 죽음에 대해 여러 가지 해석이 있겠지만 내 생각으로는 이 영화 속 죽음은 단순한 끝이 아닌 새로운 시작의 밑바탕이 되며 과거의 정신의 계승이라는 의미를 가지는 것 같다. 영화 속 상징적인 죽음은 자살이라 탐탁치는 않지만 나름대로의 의미는 가진다고 생각된다. 남을 위해 목숨을 버리는 희생도 의미를 갖는 죽음이다. 자신의 생명을 과감히 포기하고 타인의 생명을 구하겠다는 정신은 존경 받을 만하다. 며칠 전 개봉한 영화 ‘너를 잊지 않을거야’는 실제로 있었던 故이수현 씨의 살신성인 정신을 추모하며 만든 영화이다. 생면부지의 타인, 그것도 같은 민족도 아닌 사람을 구하겠다고 자신의 생명을 포기한 것은 누구도 욕할 수 없고, 욕해서도 안되는 것이다. 죽음이라는 것은 이 외에도 얼마든지 의미를 가질 수 있다. 이 세상에 무의미한 것은 없다.

  나만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법학과 학생이라는 특성상 죽음을 객관적 사실로 느낄 때가 많다. 특히 형법 사례 문제에서는 강간, 강도, 살인 같은 강력범죄를 단순히 글자로만 바라보기 때문에 사례에 대해 슬프다기 보다는 그냥 그런 사실이 있었구나 하는 정도로만 여기게 된다. 한 사람의 죽음이 살인죄의 결과인지, 이로 인해 처벌받는 사람은 누구고 어떻게 처벌할 수 있는지, 행위자의 고의에 의한 죽음인지 아니면 과실에 의한 죽음인지 생각하는 것처럼 죽음에 대한 철학적 탐구보다는 법적 사고와 사실적 인식에 머물게 된다. 또한 언론에 보도되는 수많은 사람들의 사망 통계는 사람의 생명이 그저 숫자 하나로 표시된다. 그러나 사람의 생명이 숫자로 표시될 정도로 무가치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고 그들의 죽음도 나름대로 의미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의 죽음만 생각해 볼 것이 아니라 사물이나 추상적인 것들의 소멸도 생각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이 세상에는 영원한 것이 없다. 금강석도 언젠가는 깨어질 것이고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도 태양의 폭발에 휘말려 소멸될 것이다. 정신은 영원하다지만 그 정신도 언젠가는 잊혀질 것이다. 신이라는 것 자체는 존재도 입증할 수 없고 무신론자들에게 있어서는 헛소리다. 이렇듯 죽음과 소멸이라는 것은 필연적인 것이고 사람과 사물에게 의미와 가치를 부여한다. 무한한 것이 있다면 과연 가치가 있을까? 희소하기 때문에 가치를 인정하고 너나 나나 가지려고 하지 않는가? 모순된 말이겠지만 ‘영원하지 않은 것만이 영원하다’는 말이 떠오른다.

  만약 내가 죽음을 앞에 두고 있다면 과연 나는 의연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나도 확답은 할 수 없다. 하지만 처음에는 혼란스럽고 슬프겠지만 정신을 가다듬고 죽음을 똑바로 바라본다면 괜찮아 질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다. 사실 앞의 가정을 했지만 인간은 언제 죽을지 모른다. 당장 내일 사고로 죽을 수도 있고 나도 모르는 병에 걸려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죽을 수도 있다. 그러나 왜 이런 말도 있지 않은가. ‘죽은 시인의 사회’라는 영화에도 나왔던 대사인 라틴어 'Carpe Diem'이라는 말 말이다. 영어로 번역해자면 Sieze the Day고 한국어로 번역하자면 미래에 대한 걱정을 떨쳐버리고 현재를 즐기라는 것이다. 우리가 언젠가는 죽는다는 것을 알고 있는 이상 그에 대해 아무리 걱정해도 소용이 없다. 그냥 현재를 살면 되는 것이다. 걱정한다고 죽음이 도망가겠는가? ‘불확실한 미래보다 확실한 현재에 충실하자’와 ‘오늘은 어제 죽은 자가 간절히 바란 내일 이다’라는 말을 좌우명으로 삼고 있다. 죽음에 대해서도 ‘아직 오지도 않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고 현재에 충실하고, 현재에 충실하다면 다가올 죽음도 반가이 맞이할 것이다’라고 여기고 있다.

  죽음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은 누구나 다를 것이다. 그리고 정답도 없을 것이고 죽음에 대한 태도도 다를 것이다. 다만 나는 죽음이란 무의미하지 않다는 것과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



-  2009년 1학기, 강원대학교 교양수업 "사랑과 죽음" 기말고사 대체 리포트에서 발췌한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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