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러두기 본 내용은 헤럴드 셰터 지음, 김진석 옮김, 연쇄살인범 파일, 2007, Human & Books 에서 발췌한 자료입니다.


이 사건은 장소가 의미심장하다. 교외의 맥도날드 식당은 행복한 가정생활의 미국적 표상이자 물질적 풍요의 상징이었다. 범인 제임스 올리버 휴버티가 그토록 갖고 싶어했지만 가질 수 없었던 삶의 모든 것이 그 맥도날드에 압축되어 있었다.

  휴버티의 삶은 처음부터 비참했다. 광신도였던 어머니는 휴버티가 일곱살 되던 해에 가출했다. 아버지 아래에서 자란 제임스 휴버티는 외로움을 많이 탔고 화를 잘 냈다. 휴버티의 유일한 친구는 집에서 기르던 개였고, 그의 주요한 관심사는 오로지 총이었다. 휴버티의 어릴 적 꿈은 장의사가 되는 것이었고, 이후 그는 피츠버그에서 장의사 자격증을 땄다. 그러나 그에게는 훌륭한 장의사가 되는 데 필요한 개인적인 능력이 부족했다. "그의 실력은 좋았어요, 그런데 그는 사람들과 잘 지내지를 못했어요." 직업학교 교수는 후버티를 그렇게 평가했다.

  그래도 한동안은 그럭저럭 괜찮았다. 1965년, 휴버티는 23세의 나이에 여자친구 에트나와 결혼했다. 그는 몇 년 후 오하이오 주 메사일론의 깨끗한 집으로 이사를 했다. 1970년대 초반 휴버티는 자녀가 둘이었고, 캔튼 근교의 공장에서 용접공으로 안정된 직장생활을 했다. 가정은 휴버티의 생활의 중심이었으며, 그는 아내와 딸을 제외하고는 아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휴버티는 이웃들과 사소한 일로 티격태격하는 일이 잦았으며, 시간이 나면 주로 총기 서적을 읽었다. 그렇지만 대체로 이 기간 동안 휴버티의 삶은 안정적이었고 그 어느 때보다 만족스러웠다.

  1980년대 초에 불황이 닥치면서 안정된 기반은 무너져내렸다. 공장은 문을 닫았고 휴버티는 직장을 잃었다. 이떄 "그의 주위에서 삶이 허물어졌다"고 훗날 에트나는 말했다. 그는 6개워간 실직상태였고 다시 직장을 구했지만 곧 해고되고 말았다. 그는 자살이라는 말을 입에 올리기 시작했고, 상황은 갈수록 나빠졌다.

  그를 알던 한 지인의 말에 따르면, 이 무렵부터 휴버티는 끔찍한 생각들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휴버티는 살아갈 방법이 없다고 말했어요. 직장도 없고, 아무것도 없다고 했죠. 결국 그는 식구들을 먹여 살릴 방법이 전혀 없다면, 차라리 모든 사람을 데리고 죽어버리겠다고 말했습니다."

  1983년 말,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애를 쓰던 41세의 가장은 캘리포니아 주 샌야시드로로 이사를 갔다. 샌야시드로는 멕시코 국경 북쪽 샌디에이고 근처의 작은 도시였다. 휴버티는 사설 경비원으로 취직했지만 오래가지 않았다. 그의 가족은 또다시 이삿짐을 꾸려야했으며, 이사를 할 때마다 집은 조금씩 더 허름해졌다. 휴버티는 점점 과대망상에 사로잡혔고, 거듭된 실패의 원인을 세상 탓으로 돌리며 분통을 터뜨렸다. 1984년 7월 18일 수요일, 교통 범칙금을 내러 법원에 다녀온 직후 마침내 올 것이 왔다. 휴버티는 아내에게 "이렇게 되지 않을 수도 있었는데……."라고 말했다. 몇 시간 뒤 침실에서 나온 그는 검은색 티셔츠와 군복 바지를 입고 있었다. 아내는 남편에게 어디를 가느냐고 물었다.

  '사람 사냥'을 간다고 그는 대답했다.

  잠시 후 휴버티는 가까운 맥도날드 음식점에 반자동소총과 9밀리 권총, 12게이지 산탄총, 탄약이 가득 든 배낭을 메고 모습을 드러냈다. 맥도날드 문을 열고 들어서는 것과 거의 동시에 총구는 불을 뿜었다. 75분이 지났을 때 21명이 숨졌고, 19명이 부상을 입었다. 그 대다수는 아이들이었다. 제임스 휴버티의 검은 가슴에 특별기동대(SWAT)의 총탄이 박힌 뒤에야 대략학살은 끝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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