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을 보고 친거라 중간에 오타가 나올지도 모르니 지적해 주시면 수정하겠습니다.


테슬라, 논란의 삶과 죽음 - 진 매닝


전기는 어디에나 있다. 그 양은 무한하여 석탄이나 석유, 가스, 또는 어떠한 화석연료를 사용하지 않고도 전 세계의 기계를 운행할 수 있을 것이다.

니콜라 테슬라


1988년 7월, 콜로라도 스프링스, 테슬라 국제 심포지엄

  내 옆에 앉은 남자는 눈에 띄지 않으려는 듯이 감정을 억제하며 조용히 훌쩍이고 있었다. 그는 두꺼운 안경을 쓴 뚱뚱한 남자로, 그런 외모가 아니었더라면 회의장에 모인 200명 남짓한 전기공학자들이나 테슬라의 팬들 중 눈에 띌 만한 구석이 없는 평범한 사람이었다. 다른 관객들은 방금 웅변적인 연설을 하고 연단을 내려가고 있는 과학자에게 아직 시선을 집중하고 있었다.

  옆에 앉은 남자가 감동을 받은 이유를 헤아리기란 어렵지 않았다. 초청연사로 나온 천체물리학자 애덤 트롬블리는 관객들을 감동의 순간으로 이끌도록 계산된 연설을 하고 있는 듯이 보였다. 먼저 그는 자신들의 영웅에 대한 칭송으로 관객들의 공감을 얻어 냈다. 테슬라는 세기의 전환기를 살았던 천재적인 과학자로, 교류전류 기술과 레이더, 형광등, 날개 없는 터빈 등을 발명했다. 뿐만 아니라 그는 로봇이나 로켓,입자광선 따위에 대해 최초의 실천적인 논의를 한 사람이다. 트롬블리는 이 사회가 '세기가 바뀔 무렵 마차를 타고 지금은 호텔이 된 이 근처를 지나면서 테슬라가 생각했던 아이디어를 도입했다면, 오늘날 우리는 화석연료 경제 속에 살고 있지 않을 것'이라며 얘기를 이어갔다. "그리고 그 화석연료 경제에 입각해서 모건이나 록펠러, 기타 많은 자본가들이 천문학적인 재산을 긁어모으지 못했을 것이다."


우주의 '진공'에서 얻는 우주에너지

  트롬블리는 테슬라의 미래관이 세상 사람들의 지지를 얻었다면 우리는, 마치 우주라는 샘에서 물을 긷듯이, 청정하고 풍부한 에너지의 세상에서 살고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마침내 오늘날의 물리학 문헌들도 이러한 진공 에너지를 다루기에 이르렀다.

  ……비주류 문헌만이 아니다. 《피지컬 리뷰》는 1975년 이후, 《현대물리학 평론》은 1962년 이후, 그리고 유럽의 물리학계는 이미 1950년대부터 이 문제를 다루었다. 1987년 해럴드 풋호프는 《피지컬 리뷰》에 발표했던 논문에서, 기저상태(바닥상태)의 수소원자가 붕괴하지 않으려면 진공으로부터 에너지를 흡수해야 한다고 지적한 바 있다.

  트롬블리는 이러한 학계의 연구들이 테슬라의 주장을 더욱 뒷받침해 주는 증거들이라고 보았다. 그는 19세기의 테슬라가 이미 '언젠가 인류는 인류가 만든 모든 기계를 자연의 톱니바퀴, 즉 진공 공간 에너지에 의지하게 될 것'이라고 예측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전자(電子)는 에너지 배경장(background field)에서 자연히 만들어지는 것이며, 그렇지 않다면 '만물은 특정한 시점(始點)을 갖고 있다는 네안데르탈인 같은 생각을 받아들여야 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초청연사는 관객들이 자신의 냉소적인 유머를 이해할 수 있도록 잠시 기다리는 듯 하더니 설명을 덧붙였다.

  "우리가 지난 수십 년간 빅뱅이론을 붙들고 있는 동안, 몇 가지 실질적인 문제가 노출되었어요."

  하지만 더욱 발전된 우주론에서는, 만물을 에너지로 충만한 배경장의 변형태(變形態)로 본다. 우리의 물리적인 신체는 상대적으로 사소한 장 변형이다. 배경장 자체는 중량으로 환산하면 세제곱센티미터당 1094그램의 힘에 해당하는 피텐셜에너지(위치 에너지 따위의 잠재적 혹은 내재적인 에너지)를 갖고 있다. 이와 비교하여 인간의 신체는 세제곱센티미터당 1그램에 해당하는 에너지를 갖고 있다. 이것은 배경장이 인간의 신체보다 10의 94제곱 배나 많은 에너지를 갖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루즈벨트에게 얘기했던 계획

  이것은 엄청난 양의 에너지다. 그런데 왜 킬로와트 급의 우주에너지를 담을 수 있는 휴대용 장치를 발명하지 않았을까? 이것은 '세제곱센티미터당 1094그램의 힘에 비하면 너무나도 적은 수박 겉핥기 정도에 지나지 않는 양'이기 때문이었다.

  "1943년에 테슬라가 프랭클린 루즈벨트를 만나려고 했던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이었습니다. 1943년에 그는 루즈벨트에게, 우주로부터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에너지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점을 세심하게 조사해볼 필요가 있다고 제안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약송 장소에 나타나지 못했어요. 아파트에서 시체로 발견되었기 때문이죠. 사인은 '자연사'였답니다."

  공식적으로 발표된 사인은 자연사였지만, 평소 테슬라가 독살당할지도 모른다는 편집증적인 공포를 보인 것으로 보아 단순히 정신병 이상의 뭔가 다른 징후가 있었다고 트롬블리는 조용히 덧붙였다. 그는 자신의 이러한 생각과 관련하여 한 사건을 얘기했다. 1981년 그는 캐나다의 토론토에서 비주류 에너지학에 관한 강연을 했다. 강연이 끝나자, 강한 뉴옥 억양을 쓰는 한 늙은 신사가 그에게 찾아와, 자기는 테슬라의 시체가 발견되었을 때 사건을 담당했고 조사에 관여했던 형사였다고 말했다. 늙은 남자는 자신이 형사였다는 낡은 증명서를 트롬블리에게 보여주었다.

  트롬블리는 조용한 목소리로, 노인이 "국가안보상의 이유 때문에 테슬라가 독살당했다는 코로너의 보고서 내용이 전여 홍개되지 않았다"는 말을 했다고 얘기했다.

  콜로라도 스프링스의 회의장에 이 이야기가 발표되자 테슬라 협회 사람들은 아무도 입을 열지 못했다. 강연자로 나온 물리학자가 가볍게 스캔들을 입에 담아 구설수에 올릴 만한 인물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트롬블리의 강연이 끝나고 청중들의 박수가 터져 나올 때까지도 침묵은 계속되었다.

  테슬라의 이야기가, 한 죽은 발명가의 삶이 다른 세대의 기술자들에게 왜 그렇게 감동을 주었는가를 이해할 수 있으려면 몇 가지 중요한 사건들에 관해 되짚어 볼 필요가 있다.


천재의 어린 시절

  1800년 말, 도시를 밝히는 교류전류의 발전 및 송전 시스템의 발명자들이 세계에 알려질 무렵, 그는 우아한 차림새의 위트 넘치는 독신남이었다. 하지만 발명에 관한 그의 인생은 거기서부터 시작된 것이 아니었다.

  1856년, 지금은 유고슬라비아가 된 스밀랸의 시골 마을에서 태어난 테슬라는 어린 시절에 콜레라를 앓았고, 그로 인해 형을 잃음으로써 자연과의 신비한 조우를 발바닥부터 머리끝까지 경험했다. 그의 아버지는 시를 쓰는 목사였고, 어머니는 사진 같은 기억력을 가진 이야기꾼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녀는 가사노동을 줄일 수 있는 여러 가지 장치를 만들기도 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발명가로서 재능을 보여 여섯 살 무렵에 날개 없는 독특한 물레방아를 만들어 개울가에 세워 두었다. 뿐만 아니라 살아 있는 풍뎅이 열여섯 마리로 움직이는 모터를 만들어 아버지를 놀라게 했다. 하지만 아버지는 그가 가업을 이어 성직자가 되어야 한다는 고집을 꺾지 않았고, 일찍부터 엄격한 정신적 교양을 쌓게 했다.

  테슬라는 성년이 되어서야 가까스로 아버지의 허락을 얻어, 신학이 아닌 공학을 공부할 수 있었다. 그라츠에 있는 오스트리아 기술학교를 거 쳐 1880년에 프라하 대학을 마친 다음, 유럽의 전화회사에서 근무하며 많은 것을 배웠다.

  한편, 대학시절부터 그에게는 어깨를 짓누르는 매우 어려운 문제가 있었다. 전기 모터와 발전기를 개량하겠다는 것, 발전기는 본질적으로 끊임없이 방향이 변화하는 유형의 전기, 즉 교류전류를 생산할 수밖에 업다. 테슬라는 직관적으로 교류전원을 이용하여 전기 모터를 돌릴 수 있을 것이며, 정류기에서 발생하는 스파크 방전으로 인한 효울 저하를 막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그의 생각은, 전기 모터는 직류전원에 의해서만 구동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교과서적 지식과 상반된 것이었다.


자기 회오리 발견

  담임 교수의 조롱에도 굴하지 않고 테슬라는 좀더 좋은 방법이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버리지 않았다. 이 문제에 대한 연구에 몰두하던 그는 결국 건강이 악화되었다. 요양하는 동안 기계와 체육을 전공하던 한 친구가 찾아와 부다페스트를 가로지르는 장거리 산책을 제안했다. 1882년 함께 공원을 걷던 테슬라는 태양이 지는 것을 보면서 갑자기 영감을 얻었다. 교류전기로 모터를 구동한다는 기술적 난재를 해결할 수 있는 획기적인 전기를 마든 것이 바로 그때였다. 테슬라는 독일의 시인이자 대문호 괴테의 《파우스트》의 한 구절을 인용하며 그 순간을 회상했다.


광채가 스러지면, 업적은 고단한 노고의 시작.
저 멀리서 채근하나니, 삶의 새로운 탐구 영역이여.
아, 지상의 나를 들어올려줄 날개가 없도다.
가야 할, 비상해야 할 그 길로.


  길에서 멈춰선 테슬라의 눈앞에 생생한 그림이 펼쳐졌다. 마치 회전운동을 하는 자기장이, 삼차원 홀로그래픽처럼 눈앞에서 전기 모터가 돌아가기 시작했고, 손을 뻗어 안으로 집어넣었다. 그는 소용돌이치는 자기장을 눈으로 보았다. 자기장은 서로 엇갈린 교류전류에 의해 유도된 것이었다. 그는 원을 네 부분으로 나누어 배치·분리된 코일을 보았다. 첫 번째의 교류전류가 자석을 끌어당기는 전자기장을 생성시키도록 코일에 에너지를 전달하고 사라졌다. 두 번째 전류가 이에 겹쳐지며 다음 번 코일에 전기를 전달하여 자석을 더욱 끌어당긴 다음, 마찬가지로 사라졌다. 테슬라는 이 과정을 태양이 우주를 여행하며 '가는 곳마다 생명을 주는' 것에 비유했다.

  흥분에 겨운 테슬라는 말없이 손을 내저었다. 친구는 그를 가까운 벤치로 데려가 앉히려고 했지만, 테슬라는 짚고 있던 지팡으로 땅 위에 도면을 그리며 소리를 질렀다

  "보게나, 이게 내가 고안한 모터야! 내가 이걸 거꾸로 돌릴테니, 보게."

  친구는 그가 미쳤다고 생각했다. 테슬라는 사실 그 순간 다른 세계에 있었다. 영상이 움직이는 것을 보면서, 그는 훗날 20세기를 움직이는 전기 원리를 깨닫게 되었던 것이다.

  움직이는 자기장이라는 개념은 단순히 모터를 개량하는 원리 이상이었다. 바로 전기산업의 혁명이었다. 그는 한 번에 대여섯 개 정도의 전류가 겹 쳐서 진행되는 도면을 그렸고, 이것은 다상전류 송전 시스템의 토대가 되었다. 하짐나 먼저 이 세계를 바꿀 발명을 현실로 옮길 수 있도록 자금을 지원할 투자자들을 설득해야 했다. 다음 해에 파리에서 일자리를 마련함으로써 발판을 마련했고, 그곳에서 발전기 수리기술자로 이름을 날림으로써 콘티넨탈 에디슨사의 주목을 끌 수 있었다. 그는 두 번째 단계로 스트라스부르 시장의 주선으로 유력한 투자가들 앞에서 그의 첫 유도 모터를 시연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방전되지 않는 모터라는 테슬라의 미래상을 이해하지 못했다.


막노동꾼에서 백만장자로

  그는 틀림없이 미국에서는 환영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스물여덟 살의 젊은 테슬라는 기회의 땅으로 건너갈 준비를 마쳤고, 곧장 개발에 착수하면 자신의 위대한 발견이 인류의 이익을 위해 쓰여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파리를 떠나기 전, 콘티넨탈 에디슨사의 상사가 토마스 에디슨에게 추천장을 써 주었다.

  "나는 두 사람의 위대한 발명가를 알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한 사람은 물론 당신입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은 바로 이 젊은이입니다."

  1884년 6월 6일 뉴욕 항에 도착했을 때, 테슬라의 주머니에 있는 돈은 단돈 4페니가 전부였다. 배를 타고 오던 도중에 도둑을 맞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의 풍모는 빈곤에 지친 전형적인 이민자들의 모습과는 달랐다. 중절모와 세련된 코트를 걸쳐 입은 그의 모습은 귀족의 풍모를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다행히 에디슨에게 보내는 소개장은 아직 갖고 있었다.

  당시 에디슨의 나이는 서른일곱 살이었고, 발명가뿐만 아니라 이미 사업가로서도 능력을 인정받고 있었다. 그는 처음에는 테슬라의 우상이었다. 유럽인의 겸손으로 그는 에디슨의 성공을, 몇 년 안 되는 정규교육 이후 오로지 시행착오를 통해 일궈냈던 성과를 존경했던 것이다. 그는 에디슨의 무례한 태도 따위에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러나 에디슨은 한편으로 교류전기를 실용화시킬 수 있는 테슬라의 이론을 달갑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전등에 직류를 채용했으며, 직류기술 개발에 모든 노력을 쏟아붓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테슬라에게는 에디슨의 직류발전기와 선박용 모터를 수리·개량하는 일이 맡겨졌다. 그는 에디슨의 맨해튼 공장에서 하루에 18시간씩 일하며 곤란한 기술적 문제를 해결함으로써 에디슨의 인색한 칭찬을 얻어 낼 수 있었다.

  하루는 테슬라가 에디슨이 개발한 발전기의 효율을 어떻게 개선시킬 수 있는지 설명하자, 에디슨은 이렇게 대꾸했다고 한다. "거기에 오만 달러는 내놓겠네. 자네가 성공한다면 말일세." 이 유럽의 이민자는 32시간 동안 쉬지 않고 일을 했다. 그렇게 한 달이 지나 새 발전기의 실험이 끝나자, 에디슨은 개량된 발전기로 돈을 긁어모을 준비를 했다. 그렇지만 테슬라가 에디슨을 찾아가 약속했던 5만 달러를 달라고 했을 때, 에디슨은 돈을 내놓지 않았다.

  "이보게 테슬라, 자넨 미국식 유머를 이해 못하는군."

  테슬라는 탁월한 유머감각을 가진 사람이었지만, 구두계약이라고 하여 멋대로 취소해도 달가워할 수 있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는 그 방을 나와 동료들과 함께 삽질이나 계속해야 했다.

  그로부터 2년이 지난 후에 비로소 행운이 찾아왔다. 교류 다상전류 송전 시스템을 개발할 수 있는 기회를 얻어 교류 모터와 정류기, 발전기의 특허를 얻어냈던 것이다. 1891년까지 테슬라는 교류유도 모터와 다상 송전 시스템에 관한 40개의 특허를 등록했다.

  테슬라가 역사를 바꾸어 놓을 수 있도록 도와주었던 사람이 바로 기업가이자 철도용 공기식 브레이크의 발명가인 조지 웨스팅하우스였다. 피츠버그에 살던 웨스팅하우스는 팔자 모양의 콧수염에 작달막한 체형이었지만 사업에 있어서는 추진력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나이아가라 폭포와 같은 거대한 수력자원을 이용하여 전기를 생산하고, 전선을 통해 고압으로 원거리까지 송전할 수 있는 테슬라의 기술적 전망을 공유했다. 그는 교류 시스템에 관한 테슬라의 특허를 모두 사들였고, 대신 현금 100만 달러와 함께 이 시스템이 1마력의 전기를 생산할 때마다 2.5달러의 로열티를 지불한다는 계약서에 서명했다. 테슬라는 아마 앞으로 더 이상 돈 문제를 걱정할 일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으리라. 마음 속에 담고 있던 것을 개발하는 데에 전력을 다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으리라.


큰 도박

  소위 '전류전쟁', 즉 직류와 교류 사이의 전쟁은 웨스팅하우스와 테슬라를 기다리고 있던 첫 번째의 도전이었다. 당시 미국은 아직 전력망을 갖추고 있지 않았지만, 직류 사용을 옹호하는 집단들이 토착적인 이해관계를 형성하고 있어서, 발전이나 송전, 전류의 사용에 교류가 도입되는 것에 대해 완강하게 저항하고 있었다. 반대파의 대표자는 에디슨이었다. 그의 발명이 모두 직류에 뿌리는 두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직류는 원거리 송전이 불가능하다. 전등과 전열기, 기타 전기장치에 직류로 전원을 공급하려면, 적어도 1제곱마일마다 발전소가 하나씩 필요했다. 그렇게 발전소를 세웠다고 해도, 말단에 있는 전구는 거의 불이 들어오지 않는다. 만약 에디슨의 직류가 이 전쟁에서 승리했다면, 고층 빌딩이나 엘리베이터 따위는 꿈도 꾸지 못할 일이었다.

  테슬라는 교류가 직류보다 배전에 유리하다는 점을 알고 있었다. 교류는 아주 얇은 전선으로도 고압의 전류를 수백 킬로미터까지 손쉽게 송전할 수 있으며, 변압기를 이용해 전압을 낮추면 가정용으로도 쓸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전류전쟁에서 많은 동물들이 희생양이 되었다. 전쟁이 진행되는 동안, 에디슨이 교류에 대한 직류의 이점을 선전하는 연설을 하고 있을 무렵, 뉴저지 주 실험실 근처의 개와 고양이들이 의문의 실종을 당했다. 1887년 내내 에디슨과 에디슨의 직원들은 매일같이 거리에서 동물들을 포획하고 다녔고, 밤에는 리포터들과 다른 관계자들을 초청하여 무고한 개들을 얇은 양철판 위에 올려놓고 고압전류에 감전되면 어떻게 되는지를 보여주었다. 물론 테슬라와 웨스팅하우스의 교류전류를 이용해서 말이다. 그리하여 에디슨은 감전을 가리키는 말로 '웨스팅하우징'이라는 말을 썼다.

  에디슨의 진영은 교류전류를 감전·감전사와 연결시키는 전략의 일환으로, 협박성 광고전단을 만들어 웨스팅하우스가 그다지도 위험한 교류전류를 각 가정에 도입하려고 한다고 겁을 주었다. 그렇지만 에디슨은 전압이 가정용으로 변압될 것이라는 사실을 의도적으로 누락시켰다. 이 같은 허위선전을 통해 에디슨은 사람들이 낮을 효율성에도 불구하고 직류를 지지하게 하려고 했던 것이다.

  교류가 위험하다는 비난을 무마시키기 위해 테슬라는 대응적인 쇼맨십을 개발했다. 몸에 전류가 통해도 아무 해가 없는 것을 증명하려고 했던 것이다. 흰색 타이와 연미복, 그리고 코르크로 밑창을 댄 구두를 신고 그는 연단에 섰다. 수십만 볼트의 전류가 딱딱, 찍찍거리는 소리를 냈고, 테슬라는 이 전류가 자기 몸 위를 지나 손에 든 전구에 불이 들어오게 했다. 실은 전압이 매우 높아도 전류량을 줄이고 진동수가 큰 전류를 썼던 것이다. 그런 전류는 몸 위를 지나더라도 중요한 장기(臟器)까지 도달할 수 없다. 그러나 실제 가정에서 쓰는 전기의 주파수는 60헤르츠이며, 이 실험과 같은 높은 주파수의 전류가 공급되는 것이 아니다. 에디슨에게 대응하기 위한 하나의 속임수였던 것이다.


거물이 웨스팅하우스에게 압력을 행사하다

  거대한 수력발전소 건설 프로젝트는 교류전류 옹호자들에게 있어 두 번째로 커다란 승리였다. 1895년, 테슬라가 개발한 최초의 발전설비가 나이아가라에서 가동되었다. 마침내 테슬라의 배전 시스템을 통해 막대한 양의 전기가 북미대륙 전체로 송전되었던 것이다. 웨스팅하우스는 1마력의 전기가 생산될 때마다 테슬라에게 2.5달러를 주기로 약속했기 때문에, 테슬라는 죽을 때까지도 갑부로 남아 있을 수 있었다.

  하지만 '독점화'라는 서슬 퍼런 칼날이 웨스팅하우스의 목을 조이기 시작했다. 현실 경쟁의 압박에 따라 경쟁자에 의해 밀려날 위기에 처함으로써, 마침내 '테슬라와의 계약을 파기하라, 그렇지 않으면 끝장이다."라는 최후 통첩을 받게 된 것이다. 웨스팅하우스가 그에게 자신의 입장을 얘기하며 재정적인 곤란을 호소했고, 테슬라는 자신의 권리를 주장했다. 그렇지만 테슬라는 웨스팅하우스가 자신을 믿어 주었고, 아무도 감히 나서지 못할 때 새로운 교류전류 특허에 투자해 주었다는 사실을 기억해 냈다. 더구나 웨스팅하우스가 살아 남아야 기술이 계속 발전할 수 있다고 생각한 테슬라는, 생산 전력량에 따라 받기로 했던 수백만 달러의 이익과 권리를 포기하기로 했다. 친구를 돕기 위해 수지맞는 계약서를 찢어버렸던 것이다.

  한편 전력업계의 독점자본가들은 돈 냄새를 맡고 꼬여들기 시작했다. 테슬라의 발명으로 거대한 폭포에서 생산된 전력이 주의 경계선을 넘어가기 시작하자, 경제계의 거물들이 전기제품을 생산하는 회사로 막대한 돈을 벌어들일 준비를 했다. 이들 경제계의 거물들은 지속적인 성장과 더불어 온 지구를 송전탑과 변압기, 전선으로 뒤덮기 위해서 60헤르츠의 교류전류를 필요로 했다. 산기슭을 오르내리며 사막을 횡단하는 송전탑의 행진이 이어졌다. 전력회사들은 수력발전을 위해 강마다 댐을 설치하고, 자기 회사의 구리선을 통해 전송되는 전력에 대해 와트당 일정한 돈을 요구했다. 전력업계의 거부들은 테슬라가 자신들의 커 가는 돈주머니의 뿌리를 자르는 것을 원치 않았다. 모건은 이미 제너럴 일렉트릭 같은 대기업을 줄줄이 만들었고, 송전선이 궁극적으로 공업화된 북미대륙을 연결하는 젖줄이 될 것임을 눈치채고서 구리광산을 사들였다.

  반면 테슬라는 연구자였지 야차 같은 사업가는 아니었다. 그의 다음 계획은 무선송전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테슬라의 송전장치가 주파수를 공명시키면, 그와 동조된 수신기를 바닥에 꽂아, 누구나 우주에너지를 얻을 수 있는 장치!

  월스트리트의 투자가들에게는 테슬라의 '무선'이라는 말이 쉽사리 이해되지 않았다. 너무 시대를 앞지른 계획이어서, 모두들 아리송할 뿐이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전망을 이해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이면 누구든 가리지 않고 충분한 설명을 해주었다. 세계박람회의 화려한 조명이 세상을 아찔한 흥분의 도가니로 몰아 넣었던 바로 그 해에, 그는 프랭클린재단 강연에서 '지구공명'이라는 개념을 처음 제안했다. 지구공명은 무선전력 계획의 일부였다. 그 성공의 열쇠는 적절한 전기 펄스 송신주파수를 찾아내는 것이었다. 공명이란 피아노를 조율할 때 소리굽쇠가 일정한 진동수의 음을 발생시키면 피아노 줄이 진동을 일으키는 원리이다. 마찬가지로 무선전력은 수신장치가 송전기의 주파수와 공전(共振)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러면 라디오 방송국의 주파수를 맞추는 것처럼 전력이 동조된다. 연구자들 가운데에는 테슬라가 전리층과 지상 간의 공동을 공진시키는 방법을 썼을 것이라고 보는 이들도 있다.

  이전의 발명이 진부해지는 것 따위에는 전혀 개의치 않고, 그는 그 뒤로 몇 년 동안 무선송전 과정에 관한 이론 연구를 계속했다. 업계는 그가 무선통신에 대해 이야기한다고 생각했지만, 그의 계획은 그보다 훨씬 원대했다. 누구나 지구상 어느 곳에서나 자유롭게 쓸 수 있는 전기가 그것이었다. 테슬라가 지향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깨닫기 전까지는 존 애스터나 모건 같은 사람도 잠시 개발비를 지원하기도 했다.

  한편 그는 나이아가라 폭포의 테슬라 발전기가 전기를 생산하기 시작하던 해애 중대한 시련을 맞는다. 1895년 3월 어느 날 밤, 실험실에 불이 나서 연구기록과 기자재를 모둥 잃고 말았던 것이다. 그가 모임에서 돌아왔을 때, 이층부터 기초까지 무너져 내린 건물에서는 휘어진 철재들 사이로 연기만 피어오르고 있었다. 연구기록을 잃었다는 것은 그가 연구 성과를 입증할 수 없다는 것을 뜻했다. 예컨대 독일의 물리학자 빌헬름 뢴트겐이 X-레이의 발견자로 기록되어 있지만, 만약 기록을 잃어버리지 않았다면 X-레이를 처음 구상했던 사람이 바로 테슬라임을 입증할 수도 있었으리라.


번개의 신

  이어서 테슬라는 전기와 통신을 무선으로 송신하는 방법에 관한 연구에 주력했다. 1889부터 1890년까지 콜로라도 주 콜로라도 스프링스의 고지대로 실험실을 옮겨 새로운 아이디어를 실험하고 무선 주파수 동조기술을 발전시켰다. 그는 소들의 목초지가 있는 산기슭에 고압전기 실험실을 세웠다. 실험실에는 세상에서 가장 큰 테슬라 코일이, 지붕에는 깃대처럼 생긴 구조물이 설치되었다. 한편으로 그는 전 지구상으로 전자기진동을 송출한다는 새로운 목표를 위해 대규모 실험을 진행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휴대용 메시지 수신장치에 테슬라 코일이 적용될 수 있는 가능성을 확인했다.

  콜라라도 스프링스의 '번개의 신' 실험은 정말 극적이었다. 그가 전기를 방전시키자 천둥소리가 적어도 25킬로미터 밖까지 울려 퍼졌다. 지름 15.6미터의 거대한 테슬라 코일은 순간적으로 1200만 볼트의 전기를 방전시켰고, 깃대 끝의 구리 구에서 지가된 전기 스파크가 최소한 30미터 이상 이어졌다. 마을 사람들은 실험실에 불이 났을 것이라 생각했다. 전기작가 체니는 이 실험 때문에 땅이 강하게 대전되어 실험실에서 한참 떨어진 곳에서도 걸을 때마다 발과 모래 바닥 사이에 작은 불꽃이 일었다고 한다. 그리고 800미터다 떨어진 곳에 있던 말들도 금속으로 만든 말굽 때문에 쇼크를 받아, 겁에 질려 날뛰었다고 한다.

  한번은 '증폭 전송장치' 실험중에 번개를 발생시켰다가 우연히 콜로라도 스프링스에 전력을 공급하는 발전시설을 전소시켜 버렸다. 도시는 정진이 되고, 과부하가 걸린 발전기는 화염에 휩싸였다. 그는 기술팀을 파견하여 일 주일 만에 발전기를 수리해 주었다.


워든클리프

  테슬라는 세계적인 전신망과 무선전력이라는 원대한 계획의 열쇠를 찾았다는 데에 만족하여 뉴욕으로 돌아왔다. 건축가를 고용하여, 거대한 전송기로 사용할 높이 46.2미터의 건물을 설계했다. 탑의 꼭대기에는 도너츠 모양의 구리 전극이 설치되었다.

  디자인이 바뀐 건물은 롱아일랜드의 낮은 구릉지대에서 자라는 거대한 버섯처럼 보였다. 테슬라는 이 계획에 워든클리프라는 이름을 붙이고, 전력은 물론 모든 파장의 방송통신용 라디오파를 수용할 수 있는 기지로 사용할 계획을 세웠다. 1902년에 이르러 벽돌로 지은 건평 30제곱미터의 정방형 건물이 거의 완성되었고, 탑의 아래쪽에는 발전시설과 실험실이 설치되었다.

  테슬라는 사람들이 일상생활에서 무선 전기를 경험하게 되면, '인류는 개미탑처럼 수신용 안테나 주변에 몰려들 것' 이라고 예측했다. 그렇지만 그가 예측했던 열광적인 분위기는 결코 생겨나지 않았다. 하지만 모건이 자금지원을 중단한 1906년 이후로 타워의 건설이 거의 중단되었다.

  어떤 역사가들은 모건이 정말로 무선 방송에 관심이 있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모건이 잠시 테슬라의 탑에 자금을 지원했던 것은 테슬라를 움직일 수 있는 빌미를 얻기 위한 것이라고 보는 학자들도 적지 않다. 테슬라가 업계의 통제할 수 없는 단독행동파라는 게 변수로 남아 있는 한, 그의 발명이 언제든지 전기사업에 대한 모건의 투자를 위협할 수 있는 소지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물론 무선전력 송전이 성공했다면 발전시설과 구리광산의 가치가 급전 직하했을 것이다. 그리고 제네럴 일렉트릭과 같은 모건의 회사들도 상당한 타격을 입었을 것이다.

  1906년부터 테슬라의 재산은 내리막길을 향하고 있었지만, 모건은 테슬라의 편지에 대답을 하지 않았고, 월스트리트의 다른 투자가들도 마찬가지로 그가 죽을 때까지 그에게서 등을 돌렸다. 자금지원을 호소하는 한 편지에서 테슬라는 다른 사람들이 어떤 방법으로 자신에 대한 불신을 고조시키고 있는지에 관해 이렇게 이야기했다. "나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나를 시인이나 몽상가로 인식시키는 데 성공했습니다.……"

  테슬라의 전기작가 가운데는 테슬라의 심리학적 전기를 박사논문의 주제로 삼았던 마크 셰이퍼라는 심리학 교수가 있다. 그는 테슬라가 모건에게 워든클리프를 통해 통신용 신호뿐만 아니라 전력을 송출하려고 한다는 진짜 의도를 숨김으로써 재정적인 파탄의 씨앗을 뿌렸다고 주장했다. 뿐만 아니라 모건을 자본가로서의 한계를 초월하여, 최소한 테슬라가 워든클리프 계획의 무선통신 부문을 완성하여 '세계가 완전히 새로운 방식으로 발전할 수 있도록' 자금을 지원했다는 것이었다.


모건, 테슬라와의 거래를 사보타주하다

  그 후로도 테슬라는 인류에게 유익하리라 믿고 있던 그 기술을 완성할 수 없었다. 셰이퍼는 소위 영향력 있는 인물들이 모건을 만나고 난 뒤에 테슬라와의 거래를 중단했다고 언급한다.

  테슬라는 가진 재산과 노력을 모두 워든클리프와 무선송전 실험에 쏟아부었던 터라 심각한 부채에 시달리고 있었다. 또한 귀족적인 생활에 대한 그의 강한 집착은, 20년 이상의 월도프-아스토리아 호텔 생활로 터무니없는 빚을 누적시켰다. 호텔측은 빚 대신 워든클리프를 넘겨 받았다. 셰이퍼에 따르면, 테슬라가 순순히 월도프-아스토리아의 소유주를 워든클리프를 넘기기로 합의했던 것은 언젠가는 이 프로젝트를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믿음 때문이라고 한다. 그래서 커다란 돈벌이가 도리 수 있는 계획을 시작했고, 테슬라는 모든 희망을 날개가 없는 터빈에 걸었다. 그는 날개 없는 터빈이 자동차나 원양여객선, 비행기의 가솔린 엔진을 대체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고, 여기에서 벌어들인 돈으로 세계적인 무선송전이라는 원대한 계획을 완성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셰이퍼는 예컨대 소위 '죽음의 광선' 이라고 불리는 광선무기에 대한 발명과 같은 다른 발명들의 동기 중 하나는 정부로 하여금 워든클리프 타워가 군사적 용도로 보존되어야 할 필요성이 있다는 점을 납득시키기 위한 것이었다고 결론지었다. 여기에 광선 무기를 장착시킴으로써, 제 1차 세계대전 동안 미국을 내습하는 항공기나 잠수함을 파괴할 수 있는 전략적 재산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싶었던 것이다.

  구글리모 마르코니를 상대로 소송을 벌이면서 테슬라의 노력은 도욱 분산되었다. 마르코니는 1885년 3월 13일, 테슬라의 실험실에 화재가 나기 전에 주변을 배회하던 이탈리아인이었다. 1901년 마르코니는 자신이 무선전신의 발명자임을 입증해줄 수 있도록 수많은 사람들의 눈앞에서 대서양 너머로 무선신호를 보내는 데에 성공했다. 소문에 따르면, 마르코니가 대륙간 무선송진에 성공했다는 소식을 들은 테슬라는 이렇게 얘기했다고 한다.

  "마르코니는 좋은 친구야. 계속하게 내버려 두세. 어쨌든 그 친구는 내 특허의 70퍼센트 이상을 사용하고 있지 않은가."

  테슬라가 워든 클리프를 구하기 위해 수십만 달러의 빚을 갚으려고 돈을 끌어모으고 있을 즈음, 그가 갖고 있던 특허권들은 거의 소멸되었다. 그래서 그는 무선에 관한 주요한 특허들을 1914년에 다시 부활시켰다고 한다. 테슬라가 마르코니에 대한 소송에서 이기지 못한 것은 법률적인 이유 때문이 아니라 제1차 세계대전 때문이었다. 당시 법무장관보였던 프랭클린 루즈벨트와 대통령 위드로 윌슨은 전쟁이 끝날 때까지 특허권에 관한 분쟁을 허용할 수 없다는 법무부 지침을 발표했다, 그리하여 종전이 된 후에는 테슬라에게 소송이 더욱 불리하게 되었다고 셰이퍼는 주장한다(테슬라가 사망하고 난 지 8개월이 지나, 미국 최고재판소는 무선기술과 관련하여 테슬라의 기술이 마르코니보다 빠르다는 판결을 내렸다. 하지만 이 같은 판결이 있은 후에도, 아직까지 교과서들은 무선의 발명자를 마르코니로 기재하고 있다.).

  테슬라는 기업의 이익 때문에 판에서 밀려났다. "마르코니의 얼굴 마담은 바로 데이비드 사노프였고, RCA와 NBC의 창립자인 사노프는 테슬라의 특허를 교묘하게 피해갔다."

  셰이퍼는 이렇게 덧붙였다.

  "하먼드나 마르코니 같은 인물이 무선 특허에 관한 속임수로 50만 달러씩 벌어들일 때, 테슬라는 한 푼도 받지 못했다."


라디오 방송사가 테슬라를 밀어내다

  기업의 이와 같은 무자비함은 TV발명자인 필로 판스워드 사건에서 훨씬 잘 드러난다. 판스워드의 전기에서 부인 엘마는 사노프로부터 남편이 어떻게 당했는지 말하면서, 1930년 무렵 RCA는 특허사용료를 내지 않으면 누구도 방송용 송수신장비를 만들지 못하게 했다고 주장했다. "특허권이나 특허사용권, 사용료에 대한 RCA의 정책은 간단했어요. RCA는 특허사용료만 받아 먹고 사는 회사였어요. 그러나 우리는 그 사람들에게 절대로 사용료를 내지 않았어요." 엘마는 RCA가 특허와 관련하여 항상 이중적인 태도를 갖고 있었다고 덧붙였다. "그 사람들은 특허권을 독점권 보호의 거대한 보루라고 생각했지만, 그것이 개인 발명가들의 권리를 보호하고 있을 때에는 아주 귀찮은 장애물쯤으로 여겼어요." 그녀는 자신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 RCA를 상대로 싸뭉을 벌였다가 패배했던 두 사람의 무선 분야의 선구자에 관해 이야기했다. 그녀에 따르면 리 드포리스트는 파산을 당해 죽었고, 하우어드 암스트롱은 뉴욕에 있는 자신의 아파트에서 코트를 입고, 모자를 쓰고, 장갑을 낀 채로 뛰어내렸다고 한다.

  테슬라는 결코 자살 충동을 느낀 적은 없었지만, 그가 절망적인 상태였음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날개 없는 터빈에 대한 연구가 미처 진척되기도 전에, 워든 클리프를 구하려는 꿈이 무너져내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 이유 중에서 하나는 워든클리프의 새로운 주인이 그의 프로젝트에 대해 전혀 가치를 느끼지 못해, 건물의 보존을 포기했기 때문이었다. 사업가에 불과했던 새 주인은 테슬라를 헛된 몽상가로 생각했기 때문에, 실험실 내의 장비들을 구태여 보존하려고 하지 않았고, 결국 장비들은 무참하게 파괴되고 해체되었다.

  워든클리프 타워는 1917년에 폭파되었지만, 일부 소문에도 불구하고 정부가 건물을 철거한 것은 아니었다. 장비는 철거되어 고철로 팔렸다. 이런 극적인 사건을 계기로 테슬라도 세인들의 관심에서 멀어지기 시작했다.


터빈에 희망을 걸다

  아마 그의 시카고 여행은 어떤 면에서 폐허가 된 워든클리프의 모습을 잊기 위한 것이었으리라. 시카고는 1893년 자신의 교류전기 기술의 전시장이 되었던 세계박람회와 같이 초창기의 성공적이던 시절에 대한 기억이 간직된 곳이었다. 그곳에서 그는 전기작가인 휴고 선스백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외에도, 날개 없는 터빈의 부품인 디스크와 관련된 기술적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골몰했다. 당시의 철강은 그 같은 고속회전을 견디지 못했다. 한편 그의 기술은 이미 시대를 앞서있었고, 1990년에 와서야 개념이 이해되어 테슬라 터빈에 대한 개량이 이루어지고 있다. 테슬라 엔진 제작자협회는 그 이름이 의미하는 바와 같이 테슬라 엔진의 개량 작업을 하는 연구자들의 협동적 네트워크이다. 테슬라 엔진은 그 무렵 그의 발명들 중에 가장 실용적인 용도로 쓰였던 바, 화석연료나 핵에너지를 폭넓게 대체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시카고에서 돌아온 테슬라는 며칠에 한 번씩 밀워크와 뉴욕을 오가며 살았다. 그가 속도계를 개발하여 시계회사에 팔았던 것은 바로 이때였다. 그리고 재빨리 현금을 마련하기 위해 발명했던 것 중에는 분수도 있었다. 이 장치는 1915년에 고안했던 것으로 적은 양의 물을 이용해 미적·심리적 만족을 유도할 수 있는 장식용 분수였다.


자금조달을 위한 필사적인 노력

  테슬라가 무기산업과 관련을 맺지는 않았을까? 테슬라는 제 1차 세계대전 전까지 독일과 관계를 맺고 있었고, 1916년부터 1917년까지 탱크와 기타 전투용 차량에 날개 없는 터빈을 장착하기로 약속했다. 셰이퍼는 모건이 테슬라에게 2만 달러 이상의 터빈 개발비를 지원했던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었다고 지적한다.

  셰이퍼의 최근의 책은 테슬라가 무선송전 계획을 재개하려고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분주했던 1915년 이후 '패배기' 의 역사를 다루었다. 여기에 인용된 서신이나 기사에 따르면, 테슬라가 나치의 선전원이나 독일의 군수산업 관련자가 같은 베일 속의 인물들과 연관을 가졌다고 한다. 궁지에 몰린 발명가 테슬라는 그들에게 죽음의 광선에 관한 아이디어를 팔아 자금을 조달하려고 했다는 것이다. 1930년대의 이런 군부 인사들과의 접촉에 관해, 셰이퍼는 "아직은 완전히 베일에 싸여 있어서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 그리고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 고 자위했다.

  테슬라 추종자들에게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지만, 칩거 생활을 하는 동안 그가 뉴욕에만 머물렀던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1925년부터 1926년경에는 필라델피아에 가서 터빈 설계에 관여했으며, 1931년에는 터빈을 제작하기 위해 US 스틸사의 책임자와 함께 일했다.

  셰이퍼는 테슬라가 자신의 터빈에 관해 300쪽에 달하는 책을 집필했지만, 그가 죽음으로써 발표되지 못했다고 주장한다.


우주에너지로 달리는 자동차?

  테슬라는 다른 발명들에 관해서는 조용히 묻어 두고 싶어했던 모양이다. 다음의 이갸기는 몇 세대가 지나고 나면 기록조차 힘들 것 같다. 테슬라가 60살 무렵이었다. 그는 다른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신형 피어스-애로우에 장착된 가솔린 엔진을 뜯어내고 80마력의 교류 모터를 달았다. 하지만 배터리가 없었다! 곧바로 그는 상자 안에 부품들을 조립하여, 상자를 자동차 좌석 곁에 설치했다. 누군가의 말에 따르면 그 의문의 상자는 길이가 60센티미터, 너비가 30센티미터, 높이가 15센티미터였으며, 손잡이 두 개가 붙어 있었다고 한다. 운전석에 앉은 테슬라가 손을 뻗어 손잡이를 밀면, 자동차는 거의 시속 130킬로미터의 속도로 출발했다. 그는 일 주일 동안 대여한 피어스-애로우 자동차로 시험을 했다고 한다. 만약 이 이야기가 사실이라면, 그 동력원이 비밀은 그의 죽음과 함께 묻혀진 것이리라.

  자동차가 '우주에너지'를 동력원으로 사용했을지도 모른다는 몇 가지 단서가 있다. 예를 들어 테슬라는 《센추리》지의 편집장이던 친구 로버트 존슨에게 보낸 서신에서, 외부의 동력원을 필요로 하지 않는 전기발전기를 개발했다는 얘기를 했다고 한다. 그리고 1930년대 초에 테슬라는 벌써 25년 전에 우주선을 이용하는 동력장치를 개발했다고 발표했다.

  이러한 발표의 내막을 밝히기 위해, 연구자들은 최근 '복사에너지 이용을 위한 장치'(미국 특허번호 658957, 1901년)와 같은 테슬라의 특허를 상세히 검토했다. 그 결과, 그는 1900년 6월호 <센추리>지의 발표 전부터 이미 '우주에너지' 발전기를 연구하고 있었음이 밝혀졌다. 존슨은 <센추리>의 기사에서, 테슬라가 태양에서 직접 에너지를 얻는 어떤 장치를 개발했지만 돈이 될 만한 것도, 만족할 만한 성능을 가진 것도 아니었다고 했다. 한편 유타의 올리버 니켈슨 같은 연구자들은 이에 관해 흥미로운 주장을 내놓았다. 테슬라 자신도 이 '우주에너지' 장치가 시장에서 판매되지 못할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무선으로 전력을 팔아 돈벌이를 할 가능성이 있었다면 재계의 거물들이 이 시스템을 외면하지 않았을 것이다.

  창조적 진영에 서 있는 오늘날의 물리학자들이라면 트롬블 리가 말했던 우주 진공의 에너지, 대략 세제곱미터당 1094그램의 상상을 초월하는 막대한 에너지를 이용할 가능성과 테슬라의 '우주에너지'를 입증할 수도 있으리라.


기관원이 테슬라의 논문을 가져가다

  전기에 따르면, 테슬라는 1943년 87세의 나이로. 가난한 중에서도 점잖을 때며 호텔 방에서 생을 마감했다. 장례식은 당대의 내노라하는 엘리트들을 포함하여 20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성 요한 성당에서 치러졌다.

  테슬라는 이미 1899년에 미국 시민권을 얻었고 그 후로 50년 동안 그의 시민권이 높이 추앙되었지만, 이상하게도 삶을 마감하는 마당에는 마치 신참 이민자처럼 취급되었다. 그가 사망한 후, 관련된 서류들이 배에 실려 유고슬라비아로 돌아갔다는 발표가 있었고, 워싱턴 당국은 그의 유산을 처리하기 위해 이국인 자산관리인을 파견했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미국 정부의 기관원들이 먼저 그의 금고를 열어 서류들을 접수했다고 한다. 훗날 유고슬라비아의 자그레브에 테슬라 박물관이 세워져, 그의 사망 후에 일어난 사건들을 견디어낸 자료들을 보관하고 있다.

  전기작가 체니는 군이 외국인 자산관리국으로부터 넘겨받은 테슬라 관련 서류를 조사했고, 마침내 오하이오 주 소재 라이트-패터슨 공군기지까지 그 흔적이 이어져 있다는 사실을 밝혀 냈다. 1980년 정보공개법에 입각한 공개 요청에 대한 공군기지측의 답변은 무책임하기 이를 데 없었다.

"테슬라의 논문을 조사했던 기구(장비실험실)가 몇 년 전에 해체되었습니다. 이관된 자료들의 목록을 광범위하게 조사해 보았지만 테슬라에 관한 기록은 찾을 수 없었고, 실험실이 해체될 때 그 문서들도 함께 파기된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믿든지 믿지 않든지 간에, 어쨌든 위대한 발견자 테슬라는 역사책에서 추방되었고, 신과학을 하는 연구자들 사이에서만 근근히 맥을 이어오고 있다. 파괴적인 목적이 아닌 지구를 정화시키려는 목적으로 군부가 테슬라의 기술정보를 비장하고 있는 것일까? 석탄과 석유를 독점하고 있는 자본가들이, 마찬가지로 테슬라의 유산마저 좌지우지하려고 음모를 꾸미고 있는 것일까? 어떠한 연료도 필요 없는 전기발전기를 발명했다는 그의 주장에 대해 생각해 보자. 테슬라는 이렇게 주장했다.

  "너무 많은 세대가 지나기 전에 우리의 기계가 우주 어디서나 얻을 수 있는 동력에 의존할 수 있어야 한다. ……온 우주가 에너지로 충만해 있다."

  그 에너지가 이용되었다면, 희소성의 원칙이라는 신화에 의지하여 이윤을 챙겼던 사람들이 그처럼 오일 전쟁을 부추길 수 없었으리라.

  자연사든 독살이든 테슬라에 관한 진실은 대다수 인류에 대한 헌신성이 결여된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구름 속에 가려져 있다.
테슬라 심포지엄에서 내 곁에 앉아 작은 소리로 흐느끼던 그 남자는 방 안을 사로잡았던 분위기에 아주 잘 동화되어 있었던 것이리라. 더구나 그는 다음과 같은 트롬블리의 말에 주먹을 꼭 쥐기까지 했다.

  "에디슨은 한 걸음 한 걸음씩 지위가 올라갔지만, 니콜라 테슬라는 정말 위대한 별 가운데 존재하는 일등성이었다."


출처: 탄압받는 과학자들과 그들의 발견(도서출판 양문 , 조나단 에이센, 2001) 202~223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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